(<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숙명여전
최승희가 입학한 여학교의 정식이름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학교 이름 자체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이 들어 있다. 1911년에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르면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중학교(남자5년제)와 고등여학교(고녀, 여자5년제)라고 불렸지만 조선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고등보통학교(고보, 남자4년제)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 여자4년제)라고 불렀다. 고등보통학교는 오늘날의 고등학교보다는 보통학교(초등학교)의 상급반 정도의 의미였다.
게다가 일본인은 중학과 고녀에 입학하기 전에 6년제 소학교를 마치지지만, 조선인은 고보나 여고보에 입학하기 전에 4년제 보통학교를 마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일본인과 조선인의 학력 격차는 3년이다. 그래서 조선인은 고보나 여고보를 졸업한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일본의 중학 4학년에 편입하여 2년 더 공부한 후 입학자격을 주거나, 조선내 대학 예과에 편입해서 2년간 수학한 후에 본과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학력 격차는 1년이 줄었다. 조선인의 보통학교 수업 연한이 6년으로 늘었고 고등보통학교도 5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 중학교도 6년으로 늘었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 학력차이는 1년만 줄어든 2년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은 일본의 중학교 4년을 마친 것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일본의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 5년으로 편입하거나 조선에 단 하나 뿐인 경성제국대학의 예과 2년을 마쳐야 했고,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 5년으로 편입해 졸업한 후 일본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조선의 제국대학의 예과를 졸업하여 별도의 입학사정을 거쳐야했다.
최승희는 1918년에 보통학교에 입학해 두 번의 월반을 통해 6년 과정을 4년 만에 마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학교 이름을 밝힌 자료가 없다. 1922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에 한 번의 월반을 통해 5년 과정을 4년 만에 마친 후 1926년 숙명여학교 갑반생 17회로 졸업했다. (아직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최승희 재학 당시, 여전히 1차 조선교육령 체제였는지 아니면 새로 바뀐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학교를 다녔는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여고보 재학당시의 성적은 전과목 우수한 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가(음악)에서 뛰어나 우에노 음악학교에 지원하도록 권고받았고 실제로 지원했으나 연령미달로 낙방한 바 있다. 월반을 거듭해 적은 나이로도 반장을 역임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고보 재학 당시에는 키가 크지 않고 말랐었다는 친구들의 증언이 있었다.
3백엔에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소문 때문에 숙명여고보는 최승희를 졸업생 명단에서 삭제하려고 했다는 증언들이 있으나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숙녀회라는 동아리는 졸업생 동아리인지 재학생 동아리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최승희는 1937년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 공연을 개최한 바 있다. 연희전문(1917), 이화여전(1925), 숭실전문(1925) 등의 사립학교들이 이미 전문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으나 숙명학원만은 재정 부족으로 전문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최승희는 숙명여전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을 개최한 것인데, 공연은 1937년 3월29일 경성부민회관에서 열렸다. 이 공연의 입장료는 10엔과 2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요금이었지만 입장권은 즉시 매진,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입장료 수입이 얼마였고, 그중에 얼마가 숙명여전에 전달되었는지 전하는 기록은 없다. 그 덕분인지 이듬해인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숙명여중,고등학교의 재단(명신학원)과 숙명여대(숙명학원)의 재단이 서로 다르며, 두 교육재단은 서로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한 조사 정리도 필요한 듯하다. 숙명여고보가 오늘날의 숙명여중고와 숙명여전-숙명여대의 모태 혹은 전신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게 아닐까? 암튼... (2017/03/15, 조정희, 1st dr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