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4, 2018

[최승희] 최초의 언론 보도-"무용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무용 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1926년 326일자 <매일신보2면 7단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이른바 "최승희 현상"은 이 신문 기사가 시발점이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의 이름은 조선과 일본과 중국, 남북 미주와 유럽, 남북한 언론의 특급 키워드였다. 심지어 타이완과 오키나와에서도 그 이름이 주목을 끌었다.

지금은 '최승희 현상'이 '전설'과 '신화'로 격상되었다. 이의 없다.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최승희 현상'에서는 사실보다 환상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이다. 거꾸로 환상을 뒷받침할 사실이 너무 적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최승희의 흔적을 쫓았던 것은 사실로 환상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사실의 비율을 약간 더 높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 거리를 조금만 좁힐 수 있다면, '최승희 현상'은 아무나 왜곡할 수 없는, 더 재미있는 전설, 더 의미있는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최승희 트레일>을 연재했다. <후아이엠(https://www.whoim.kr/)>이라는 인터넷 지면을 통해서였다. 1939년에 있었던 최승희의 유럽 순회 공연을 취재하고 쓴 글이다. 매주 30매 원고 2꼭지를 화요일과 금요일에 송고했고, 그렇게 13개월째 계속해 왔다. 사실 발굴에 치중한 나머지 작품화는 미흡하지만 3천매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이다. 이같은 원자료를 수집하고 서술할 수 있게 여건을 허락해 주신 차길진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런 <최승희의 유럽 트레일>이 이제 마무리 되어 간다. 책꽂이와 하드디스크와 웹드라이브에 쌓인 자료를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최승희 현상이 이 기사로 시작되었듯이, 최승희 트레일을 더듬었던 나의 노력도 이 기사로부터 정리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리한다고 해서 <최승희 현상>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재밌는 일을 왜 그만두겠는가. 게다가 나는 고집이 센 편이어서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한다. 내 앞에는 <도쿄 트레일>과 <미국 트레일>, <남미 트레일>이 기다리고 있다. 겨우 <유럽 트레일>을 하나 끝냈을 뿐이다.

관심도 의욕도 시들지 않았다. 겨우 '시간'과 '돈'이 모자랄 뿐이다. 지금까지 잘 헤쳐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여건이 익지 않았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는 낚아채야 한다. 최승희가 늘 그래왔듯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을 하게 될지 나도 몰랐다.^^

최승희가 최초로 언론에 보도된 기사, <매일신보> 1926년 3월26일, 3면7단
(기사 원문)
무용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이시이씨 남매의 제자가 되어
시의 나라로 첫발을 내디뎌

흐르는 곡선노래와 같은 몸의 <리듬>으로 말없는 시를 읊으며 곡조 잃은 슬픈 노래를 아뢰어 세계의 마음을 웃기고 울리며 무용의 왕국을 창조하고 있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남매는 그동안 유럽 순회공연의 길을 가는 도중에 경성(서울)에 이르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자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결국은 조선 소녀를 몇 명 제자로 쓰겠다는 말까지 나왔는데이에 대하여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淑明)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최양은 실로 맑고 어여쁜 수정 같은 미인으로 희망에 빛나는 눈동자는 조선 소녀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아담한 빛에 싸여졌다그는 처음 음악학교로 가려다가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 사범학교로 가려든 차에 이시이씨 남매를 만나 이번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오직 최양 개인의 기쁨만은 아닐 것이며그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우는 동시에 음악과 동요도 연구를 하겠다고 하니 수년 후 그의 빛나는 천재를 대하게 될 우리의 마음은 일각이 삼추라고 하겠다. - 사진은 최승희양. (*)

Tuesday, March 14, 2017

ss05-숙명여고보와 숙명여전

(<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숙명여전
최승희가 입학한 여학교의 정식이름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학교 이름 자체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이 들어 있다. 1911년에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르면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중학교(남자5년제)와 고등여학교(고녀, 여자5년제)라고 불렸지만 조선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고등보통학교(고보, 남자4년제)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 여자4년제)라고 불렀다. 고등보통학교는 오늘날의 고등학교보다는 보통학교(초등학교)의 상급반 정도의 의미였다.

게다가 일본인은 중학과 고녀에 입학하기 전에 6년제 소학교를 마치지지만, 조선인은 고보나 여고보에 입학하기 전에 4년제 보통학교를 마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일본인과 조선인의 학력 격차는 3년이다. 그래서 조선인은 고보나 여고보를 졸업한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일본의 중학 4학년에 편입하여 2년 더 공부한 후 입학자격을 주거나, 조선내 대학 예과에 편입해서 2년간 수학한 후에 본과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학력 격차는 1년이 줄었다. 조선인의 보통학교 수업 연한이 6년으로 늘었고 고등보통학교도 5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 중학교도 6년으로 늘었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 학력차이는 1년만 줄어든 2년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은 일본의 중학교 4년을 마친 것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일본의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 5년으로 편입하거나 조선에 단 하나 뿐인 경성제국대학의 예과 2년을 마쳐야 했고,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 5년으로 편입해 졸업한 후 일본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조선의 제국대학의 예과를 졸업하여 별도의 입학사정을 거쳐야했다.

최승희는 1918년에 보통학교에 입학해 두 번의 월반을 통해 6년 과정을 4년 만에 마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학교 이름을 밝힌 자료가 없다. 1922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에 한 번의 월반을 통해 5년 과정을 4년 만에 마친 후 1926년 숙명여학교 갑반생 17회로 졸업했다. (아직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최승희 재학 당시, 여전히 1차 조선교육령 체제였는지 아니면 새로 바뀐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학교를 다녔는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여고보 재학당시의 성적은 전과목 우수한 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가(음악)에서 뛰어나 우에노 음악학교에 지원하도록 권고받았고 실제로 지원했으나 연령미달로 낙방한 바 있다. 월반을 거듭해 적은 나이로도 반장을 역임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고보 재학 당시에는 키가 크지 않고 말랐었다는 친구들의 증언이 있었다.
3백엔에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소문 때문에 숙명여고보는 최승희를 졸업생 명단에서 삭제하려고 했다는 증언들이 있으나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숙녀회라는 동아리는 졸업생 동아리인지 재학생 동아리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최승희는 1937년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 공연을 개최한 바 있다. 연희전문(1917), 이화여전(1925), 숭실전문(1925) 등의 사립학교들이 이미 전문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으나 숙명학원만은 재정 부족으로 전문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최승희는 숙명여전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을 개최한 것인데, 공연은 1937329일 경성부민회관에서 열렸다. 이 공연의 입장료는 10엔과 2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요금이었지만 입장권은 즉시 매진,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입장료 수입이 얼마였고, 그중에 얼마가 숙명여전에 전달되었는지 전하는 기록은 없다. 그 덕분인지 이듬해인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숙명여중,고등학교의 재단(명신학원)과 숙명여대(숙명학원)의 재단이 서로 다르며, 두 교육재단은 서로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한 조사 정리도 필요한 듯하다. 숙명여고보가 오늘날의 숙명여중고와 숙명여전-숙명여대의 모태 혹은 전신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게 아닐까? 암튼... (2017/03/15, 조정희, 1st draft)

ss04-체부동 137번지

(<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체부동 137번지
체부동 137번지는 최승희의 여학교 시절 집주소다. 강준식(2012)은 이 주소 이야기로 <최승희 평전>을 시작한다. 지금은 서촌의 식당 <토속촌 삼계탕>이 되어 있는 곳이다. 삼계탕 매니아인 나도 철마다 들르는 이 식당이 최승희가 살던 집이라니...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찾던 맛집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약간 더 감동적이다. 강준식은 그 근거로는 니시키 마사야키(西木正明)<떠돌이 무희(流離いの舞姬)>(2010)를 들었다.

최승희도 <삼천리(19361월호)>에 기고한 <나의 무용 10년기>에서 “1926319일 오후 ... 나는 기운 없이 체부동 골목길을 올라갔다고 쓴 대목이 있다. 번지수가 나오지는 않지만 집이 체부동에 있었다는 말이다. 최승희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적부를 보면 주소가 확실해 지겠는데, 학적부를 인용한 저서는 아직 없는 듯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다. 1926627일자 <동아일보>는 최승일이 1926614<라디오극 연구회>를 창립하고 그 사무소는 시내 체부동 137번지에 두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1926325일이니까 약 한달 반 후이다. 최승희를 보내고 나서 최승일도 바로 라디오극 연구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최승일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방송(KBS)의 모태이다.
하지만 더 조사해 보니 강준식의 서술이 꼭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현재는 체부동 85-1번지인데 해방 전에는 체부동 137번지였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적도를 확인해 보니 그런 주소 변화는 없었다. 체부동 137번지와 85-1번지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서로 다른 주소다. 지금도 네이버의 지도 프로그램으로 확인할 수 있다. 최승희가 살던 집은 토속촌 식당이 아니라 그 골목 맞은편 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난 주말 그 주소로 가 봤다. (내 집에서는 자전거로 10분 거리다.) 토속촌 근처에서 체부동 136번지와 139번지는 찾았지만 137번지에는 집이 없었다. 그 자리는 토속촌의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성업 중인 토속촌이 그 집을 매입해 허물고 주차장으로 바꾼 것이다.

토속촌이 헐어버린 집이 최승희가 살던 집은 아니다. 1926년의 137번지는 초가집이었다고 했다. 초가집이 1990년대까지 남아 있었을 리 없다. 추가조사를 해보니 나보다 먼저 체부동 137번지를 답사했던 사람이 두 사람이나 더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체부동 137번지를 본적지로 가졌던 한 블로거의 포스팅이 있었다. 그는 최승희보다 최승일에 초점을 맞췄다. 아마도 그 블로거는 방송 종사자가 아닌가 싶었다. 그도 내가 <동아일보>에서 찾은 최승일의 <라디오극 연구회>의 주소지가 그곳이었던 사실을 지적해 놓았다.
또 한 명의 답사자는 그 블로거가 인용한 다른 저자였다. 월간 <방송문예>라는 잡지 19897월호에 <방송드라마 발달사: 한국 방송극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글을 쓴 임영웅은 토속촌이 매입해 허물기 전의 가옥을 직접 답사하고 이런 글을 남겼다.
이 모임(라디오극 연구회)의 사무소로 보도된 체부동 137’번지가 어떤 연유로 사무소로 쓰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필자는 지난 봄 어느 토요일 오후, 문제의 현장을 답사했다. 체부동 성결교회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기와집을 개조한 자그마한 주택에 체부동 137번지란 표지와 새문안교회교인임을 알리는 작은 매말이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워낙 오래전 일이어서 1926년 당시의 소유주는 끝내 알아내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임영웅은 최승일의 라디오극 연구회사무소 주소가 어째서 체부동 137번지였는지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집 주소를 사무실 주소로도 쓴 것이었다.
이 주소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때 그 초가집에서 최승희가 한국 근대 무용을 시작했고, 최승일이 한국 근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7/03/05, 조정희)

ss03-안막(安漠)의 이름

(<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안막(安漠)의 이름
안막의 이름에 대한 의문도 있다. 안막의 본명은 안필승이다. 안필승이 안막으로 개명한 것은 최승희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서술한 문헌이 꽤 있다. 이시이 바쿠(石井漠)과 안막(安漠)의 이름 한자가 같기 때문이다. 강준식(2012, 85)도 그렇게 썼고, 위키 백과사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안막은 안필승이 글을 발표할 때 쓰던 필명이다. 그가 이 필명을 사용한 것은 늦어도 1929년부터이다. 1929716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예 동경지부, 푸로극장 전조선 순회공연>을 보면 푸로 예술동맹 동경 지부 소속인 프로레타리아 극장 리동부대는 전 조선을 순회하야 행연하고 각처에서 강연회도 겸하야 열터라고 전하면서, <하차(荷車)>라는 작품의 연출가가 안막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막이라는 필명이 1929년에 이미 정착되었다는 말이다.
최승희 자신도 잡지 <삼천리(193810월호)>에 실은 아하, 그리운 신부시절이라는 글에서 박영희의 서재에서 안필승을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다른 이름이 안막이라는 것도 그날 알았다고 했다. 최승희가 안막을 처음 만난 그날은 결혼 직전의 19313월경이다.
안막은 동경 유학시절에도 최승희를 알고 있었고, 이시이 바쿠의 무용발표회를 관람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 안막이 최승희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고, 또 러시아 문학도가 연극인 이시이 바쿠를 좋아해 그의 이름을 필명으로 차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막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최승희가 두 번째로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 되었던 1933년 이시이 바쿠는 안막에게 정치를 그만 두라고 요구했고 안막은 바로 정치에서 손을 뗐다. 또 안막이 도쿄의 한 출판사에 취직하려 하자 이시이 바쿠는 작가는 많이 있으나 최승희와 같은 무용가는 나오지 않으니 최승희를 높여 주시오하고 요구했고, 안막은 문학 활동도 접었다. 그리고는 최승희의 전업 매니저가 되었다.

그 정도로 안막은 이시이 바쿠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같은 존경과 복종 때문에 같은 이름을 갖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법은 하다. 하지만 그것이 개명의 동기였을 수는 없다. 안필승은 이시이 바쿠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이전에 이미 안막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필승이 안막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시기는 언제일까? 그리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정병호(1995)는 안막이 이른바 펜네임으로 잡지사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는 최승일이 편집한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에 나오는 기록으로 인용되어 있다.
안막이라는 이름을 안필승이 직접 지었든, 혹은 한 잡지사에서 지어주었든, 그 이름을 채택한 이유는 뭘까? 후암재단 윤석진 주필은 사회주의자 안필승은 천재적인 공산주의 이론가 마르크스의 이름을 한자로 축약한 을 필명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고 추측했다. 이와 비슷하게 아리랑문화연구소의 차길진 이사장도 “<애정산맥>을 집필하느라 지리산 인근을 취재할 때 마을마다 막수라는 이름이 자주 발견되었다고 증언했다. 빨치산에 가담한 지역 주민들 중에서 아들을 낳으면 막수라는 이름을 붙였던 사람이 꽤 있었던 것이다.
한국 문학에도 막수라는 이름은 두 부류로 나온다. 하나는 막되어 먹은 놈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한국식 음차이다. 전자는 고우영의 <일지매>에서, 후자는 이창동의 <용천뱅이(1993)>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안필승이 안막을 필명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 마르크스의 축약 음차어로 을 필명으로 채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승희의 남편이 스승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1933년 세 사람이 지유가오카에서 다시 만났을 때 스승과 남편의 이름이 같아서 재미있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지 안막이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필명으로 따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17/2/15, 조정희)    

ss02-<반도의 무희>와 <더킹>, 그리고 <세 얼간이>

(<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반도의 무희><더 킹>, 그리고 <세 얼간이>
올해 초(1/18) 개봉된 영화 <더 킹(2017)>은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흥행에는 성공했다. 박근혜 탄핵의 한가운데서 주요 이슈로 떠올랐던 블랙리스트 덕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춤이다. 허술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등장하는 집단무가 그 허술함을 보강해 주었기 때문이다.

80년전 19363월 토쿄에서는 최승희의 <반도의 무희>가 개봉되었다. 토쿄의 신흥(新興) 키네마가 제작, 조선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일본인 유아사 가쓰에가 원작 소설,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한 곤 히데미가 감독을 맡아 완성된 영화다. 유아사 가쓰에의 원작 소설은 <노도의 보>라는 작품으로 따로 발표되어 최승희 연구가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반도의 무희>에 대한 평은 대단히 나빴다. 원작 소설가인 유아사 가쓰에마저도 영화가 원작에 충실했다고 말하기 어렵고 재미도 별로 없었다. ‘인재라고 불리는 곤 히데미의 제1회 감독 작품으로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했다.
남우주연을 맡았던 센다 고레야도 통탄했다. “나도 일본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녀(최승희)도 처음이었는데 감독인 곤 히데미 역시 영화는 처음 촬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변변한 작품이 되지 못했고...”
아사히 신문의 평은 신랄했다. “...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시나리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센다 고레아(남자 주연)와 무용연구소에 입소한 여성의 교섭이 끊어져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갑자기 은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도 실소를 금하기 어려우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친 진행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사히 신문 1936331)
그런데도 <반도의 무희>는 흥행에 성공했다. 일본 전역에서 4년이나 장기 상연됐다. 히데미 감독의 말이다. “회사는 4년 동안 이 영화로 수입을 올렸다. 일본 전국을 4년 동안이나 돌면서 상영했기 때문이다. ... 어쨌든 나는 4년동안 회사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평론가와 지식인들로부터 우작평가를 받은 영화가 이렇게 롱런하면서 큰 수익을 안겨준 까닭이 뭘까? 최승희의 춤이다. 스토리라인이 엉망이더라도 중간 중간에 삽입된 최승희의 무용 장면이 스토리의 허점과 연기자들과 감독의 미숙함까지도 무마시켜 주었던 것이다.
<더 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불량 청소년이 명문대생으로 둔갑하고, 얼결에 운동권 경력을 가졌다가 검사 임용을 받는가 하면, 검사와 조폭이 협력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설정과 진행에도 불구하고 조인성과 정우성과 배성우가 클론의 과 자자의 버스 안에서에 맞춰 추는 집단무는 그 모든 미흡함을 봉합하고 관객들의 흥을 돋워주고 몰입시켜 준 것이다.

영화 속에 뮤지컬과 집단무를 도입해 성공을 거두는 관행은 인도 영화의 특징이다. 요즘 발리우드 영화는 장르를 막론하고 주인공들의 단독무나 이인무, 혹은 수십명 혹은 수백명의 집단무를 반드시 끼워넣는다. 스토리라인을 보강할 뿐 아니라 감정전달을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Three Idiots)>(2009)가 대표적인 예이다. 201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못 말리는 세 친구>라는 제목으로 상연되어 절찬을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입시위주의 고질적인 주입식 교육의 비판이다. 내용이 빤한 영화인데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중간 중간에 뮤지컬처럼 삽입된 춤이다. (물론 영화의 춤에 익숙치않은 한국 관객들 중에서는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더 킹>의 성공을 보면 그것은 익숙치않음의 다른 표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최승희가 시작했던 영화 속의 춤은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최승희 이후 80년이나 지나서 <더 킹>이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신선함을 주는 것을 보면, 최승희가 시작했던 창의적인 신종 한류가 너무 오래 지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17/02/13,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