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4, 2017

ss01-최승희의 단발머리

(<최승희 다큐멘터리> 제작 노트: 2017/2/1-2017/5/31)
최승희의 단발머리
최승희의 평전과 소설을 보면 그의 단발머리가 남편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꽤 나온다. 예컨대 정병호(387)는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안막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면서 “최승희의 특징을 살리려고 머리 모양을 고정시키도록 조언”했는데 “솔로 댄서인 그이가 머리에 쓴 관을 신속하게 쓰고 벗을 수 있게”하거나 “수시로 가발을 하자면 단발이 필요했다”고 했다.

의문이 들었다. 여자가 머리를 남자한테 맡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최승희 자신이 원래 충분히 개성 있고 세련된 여자다. 아무리 ‘튀’더라도 자기 스타일은 자기가 정하는 여자다. 옷차림과 구두만 봐도 알 수 있다. 남편이 패션 전체를 코디를 해 주었다면 또 모를까, 머리 스타일만 안막이 제안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의혹은 직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단발 안막 제안설’도 그다지 근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저자도 이를 뒷받침할 증거나 증언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객관적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봤다. 증거는 정병호 자신의 책에 있다. 사진들이다. 정병호의 추측대로라면 최승희의 머리 모양은 안막을 만난(1931) 이후 달라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들을 시간 순으로 보면 최승희의 머리 모양이 바뀐 것은 안막을 만나기 전인 1926년경이다.


정병호의 책 19쪽에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재학 중이던 1925년의 사진이 나온다. 이때는 긴 머리를 귀가 드러나게 뒤로 넘겨서 한 댕기로 묶었다. 31쪽의 사진은 최승희가 토쿄 도착한 직후의 사진이다. (사진 설명에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지만 오해다. 사진 상단의 날짜가 1926년 4월이고 도일즉시(渡日卽時)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서울을 떠난 날은 3월25일이다. 김찬정은 최승희가 토쿄에 도착한 날을 3월24일이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이때도 긴 머리다. 다시 말해 최승희는 토쿄에 도착할 때까지 긴 머리였다는 말이다.

최승희가 도꾜에 도착해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진에서도 최승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뒤로 묶어서 한 댕기로 넘긴 머리를 보여준다. (이 사진이 도일 직후의 사진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었을 뿐 아니라 여행용 가방 위에 걸터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시이 바꾸 무용연구소에 재학했던 전 시기의 사진들에서 최승희는 단발이다. 최승희뿐 아니라 다른 연구생들도 단발머리가 많다(39, 41, 69쪽). 58쪽의 ‘이시이 연구소의 일본인 연구생과 함께 찍은 열일곱살 때’의 사진에는 최승희는 단발이지만 다른 연구생은 긴 머리다. 연구생들이 모두 의무적으로 단발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연구소 입소 후 1년반이 지난 후에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2차 경성 공연에 따라왔을 때의 사진도 단발이다(44쪽). 51쪽의 같은 시기 사진에는 모자를 쓰고 있어 식별이 어렵지만, 역시 단발머리로 추정된다.


이시이 바쿠 연구소를 떠나서 경성에 돌아와 무용연구소를 열었을 때의 사진(55쪽)에서도 최승희는 단발이고, 1931년 청량리의 청량원에서 찍은 결혼식 사진에서도 최승희는 원피스에 단발머리였다(64쪽). 이후 해방 전까지 최승희가 긴 머리를 한 사진은 전혀 없다.
이렇게 보면 최승희가 단발로 바꾼 것은 연구소에 입소 직후이다. 다른 연구생들도 대부분 단발이었던 것으로 보아, 무용 연습에 방해되지 않게 머리카락을 자른 게 아닌가 싶다. 긴 머리는 아무래도 관리에 많은 주의와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무대에 서기 시작한 이후엔 가발이나 모자나 관을 쓰는 데에 편해서 단발을 했을 수 있다. (이점도 의문이긴 하다. 긴 머리가 반드시 모자나 관을 쓰는 데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연구생 중에는 긴 머리도 많았다.)

암튼 최승희가 머리 모양을 단발로 바꾼 것은 안막의 조언 때문이라기보다는 연구소에 입소한 직후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 최승희도 다른 연구생들처럼 머리를 기를 생각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안막이 단발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조언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남편 제언으로 단발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최승희가 단발을 시작한 것은 안막과 만나 결혼한 1931년 5월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인 연구소 입소 시기(1926년 4월경)이기 때문이다. (2017/02/10)

Sunday, February 19, 2017

이스탄불과 서울

1. 오스만 제국(1299–1922)의 수도이자 터키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1453-1922)은 그리스 시기에는 비잔티온(기원전660-330년), 로마 시절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330-1453)라고 불렸다. 약 2600년 동안 수도였던 도시다. 세계에서 이만큼 오래 수도였던 도시는 없을 것이다.


서울(1394-현재)은 6백년이상 조선과 대한제국과 한국의 수도다. 그런데 ‘서울’이라는 이름은 더 그보다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 중 신라(기원전57-953)의 수도 ‘서라벌’이 서울의 어원이기 때문이다. ‘서라벌’이 ‘서울’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서울의 역사는 1천6백년쯤 된다.


2. 이스탄불과 서울은 각각 터키와 한국의 최대도시이다. 이스탄불의 인구는 약 1천4백만, 서울의 인구는 약 1천만 명이다. 터키의 인구가 8천만 명, 한국의 인구가 5천만 명쯤 되니까 두 도시는 모두 전체 인구의 20% 내외가 모여 사는 메갈로폴리스이다. 인구로 보면 이스탄불은 세계 5위, 서울은 18위이다.
3.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은 그리스의 도시국가 메가라(Μέγαρα)의 왕 비자스(Βύζας)의 이름을 딴 것으로 ‘비자스의 땅’이라는 뜻이다. 비잔티움(Byzantium)은 비잔티온의 라틴어식 이름이다. 라틴어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는 이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은 황제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리스어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를 라틴어로 번역한 이름이다.
이스탄불(İstanbul)도 그리스어 ‘에이스 텐 폴린’(εἰς τὴν Πόλιν)에서 나온 이름인데, ‘그 도시로’라는 뜻이다. 인근 지역 주요 도시는 콘스탄티노플 밖에 없었으므로, ‘그 도시’란 곧 콘스탄티노플을 가리켰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물론, 터키인들도 그렇게 불렀다. (요즘 뉴요커들이 뉴욕을 그냥 ‘더 시티(the City)’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서울은 고려시대엔 한양, 조선시대엔 한성이라고 불렸다. 둘 다 ‘한강의 도시’라는 뜻이다. ‘서울’의 어원인 ‘서라벌’은 나라 이름 ‘신라’의 어원과 같고, ‘새로운(사라-->서라) 들판(벌)’이라는 뜻이다.
서라벌은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 말은 ‘수도’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이라는 말은 ‘한국의 수도’라는 고유명사이자 ‘한 나라의 수도’라는 보통명사로도 쓰인다. 그래서 ‘터키의 서울은 앙카라다’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이스탄불은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것이지만, 서울은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스탄불과 서울은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이스탄불은 이름이 바뀔 때마다 나라와 함께 민족이 바뀌었지만, 서울은 나라가 바뀌어도 민족은 그대로였다.
4.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이다. 각각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표 사원이다. 블루 모스크는 지금도 예배의 장소이지만 하기야 소피아는 성당에서 모스크를 거쳐 지금은 박물관이다. 이스탄불에는 3천개 이상의 모스크가 있다고 한다.


이스탄불과는 달리 서울에는 뚜렷한 대표 건축물이 없다. 광화문이나 남대문 정도? 삼국과 고려는 불교 국가,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에 사원과 서원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불교 사원과 유교 서원들은 대부분 산 속이나 지방에 있다. 한국에는 천년 이상 된 불교 사찰이 많지만 전국의 명산에 퍼져 있는 편이다. 또 유명한 유교 서원도 대부분 지방에 있다. 유명 사찰은 서울에도 몇 개 있지만 서원은 모두 지방에 있다.


6. 1923년부터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다. 행정 편의와 인구 분산을 위한 조치였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도 행정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2000년대 초반에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 수도 이전을 시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바람에 계획을 시행하지 못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과 법원의 저항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2017/2/12,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