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1926년 3월26일자 <매일신보> 2면 7단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이른바 "최승희 현상"은 이 신문 기사가 시발점이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의 이름은 조선과 일본과 중국, 남북 미주와 유럽, 남북한 언론의 특급 키워드였다. 심지어 타이완과 오키나와에서도 그 이름이 주목을 끌었다.
지금은 '최승희 현상'이 '전설'과 '신화'로 격상되었다. 이의 없다.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최승희 현상'에서는 사실보다 환상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이다. 거꾸로 환상을 뒷받침할 사실이 너무 적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최승희의 흔적을 쫓았던 것은 사실로 환상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사실의 비율을 약간 더 높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 거리를 조금만 좁힐 수 있다면, '최승희 현상'은 아무나 왜곡할 수 없는, 더 재미있는 전설, 더 의미있는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최승희 트레일>을 연재했다. <후아이엠(https://www.whoim.kr/)>이라는 인터넷 지면을 통해서였다. 1939년에 있었던 최승희의 유럽 순회 공연을 취재하고 쓴 글이다. 매주 30매 원고 2꼭지를 화요일과 금요일에 송고했고, 그렇게 13개월째 계속해 왔다. 사실 발굴에 치중한 나머지 작품화는 미흡하지만 3천매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이다. 이같은 원자료를 수집하고 서술할 수 있게 여건을 허락해 주신 차길진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런 <최승희의 유럽 트레일>이 이제 마무리 되어 간다. 책꽂이와 하드디스크와 웹드라이브에 쌓인 자료를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최승희 현상이 이 기사로 시작되었듯이, 최승희 트레일을 더듬었던 나의 노력도 이 기사로부터 정리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리한다고 해서 <최승희 현상>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재밌는 일을 왜 그만두겠는가. 게다가 나는 고집이 센 편이어서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한다. 내 앞에는 <도쿄 트레일>과 <미국 트레일>, <남미 트레일>이 기다리고 있다. 겨우 <유럽 트레일>을 하나 끝냈을 뿐이다.
관심도 의욕도 시들지 않았다. 겨우 '시간'과 '돈'이 모자랄 뿐이다. 지금까지 잘 헤쳐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여건이 익지 않았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는 낚아채야 한다. 최승희가 늘 그래왔듯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을 하게 될지 나도 몰랐다.^^
1926년 3월26일자 <매일신보> 2면 7단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이른바 "최승희 현상"은 이 신문 기사가 시발점이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의 이름은 조선과 일본과 중국, 남북 미주와 유럽, 남북한 언론의 특급 키워드였다. 심지어 타이완과 오키나와에서도 그 이름이 주목을 끌었다.
지금은 '최승희 현상'이 '전설'과 '신화'로 격상되었다. 이의 없다.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최승희 현상'에서는 사실보다 환상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이다. 거꾸로 환상을 뒷받침할 사실이 너무 적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최승희의 흔적을 쫓았던 것은 사실로 환상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사실의 비율을 약간 더 높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 거리를 조금만 좁힐 수 있다면, '최승희 현상'은 아무나 왜곡할 수 없는, 더 재미있는 전설, 더 의미있는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최승희 트레일>을 연재했다. <후아이엠(https://www.whoim.kr/)>이라는 인터넷 지면을 통해서였다. 1939년에 있었던 최승희의 유럽 순회 공연을 취재하고 쓴 글이다. 매주 30매 원고 2꼭지를 화요일과 금요일에 송고했고, 그렇게 13개월째 계속해 왔다. 사실 발굴에 치중한 나머지 작품화는 미흡하지만 3천매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이다. 이같은 원자료를 수집하고 서술할 수 있게 여건을 허락해 주신 차길진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런 <최승희의 유럽 트레일>이 이제 마무리 되어 간다. 책꽂이와 하드디스크와 웹드라이브에 쌓인 자료를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최승희 현상이 이 기사로 시작되었듯이, 최승희 트레일을 더듬었던 나의 노력도 이 기사로부터 정리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리한다고 해서 <최승희 현상>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재밌는 일을 왜 그만두겠는가. 게다가 나는 고집이 센 편이어서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한다. 내 앞에는 <도쿄 트레일>과 <미국 트레일>, <남미 트레일>이 기다리고 있다. 겨우 <유럽 트레일>을 하나 끝냈을 뿐이다.
관심도 의욕도 시들지 않았다. 겨우 '시간'과 '돈'이 모자랄 뿐이다. 지금까지 잘 헤쳐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여건이 익지 않았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는 낚아채야 한다. 최승희가 늘 그래왔듯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을 하게 될지 나도 몰랐다.^^
최승희가 최초로 언론에 보도된 기사, <매일신보> 1926년 3월26일, 3면7단 |
(기사 원문)
무용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이시이씨 남매의 제자가 되어
시의 나라로 첫발을 내디뎌
흐르는 곡선! 노래와 같은 몸의 <리듬>으로 말없는 시를 읊으며 곡조 잃은 슬픈 노래를 아뢰어 세계의 마음을 웃기고 울리며 무용의 왕국을 창조하고 있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남매는 그동안 유럽 순회공연의 길을 가는 도중에 경성(서울)에 이르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자, 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결국은 조선 소녀를 몇 명 제자로 쓰겠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淑明)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최양은 실로 맑고 어여쁜 수정 같은 미인으로 희망에 빛나는 눈동자는 조선 소녀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아담한 빛에 싸여졌다. 그는 처음 음악학교로 가려다가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 사범학교로 가려든 차에 이시이씨 남매를 만나 이번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오직 최양 개인의 기쁨만은 아닐 것이며, 그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우는 동시에 음악과 동요도 연구를 하겠다고 하니 수년 후 그의 빛나는 천재를 대하게 될 우리의 마음은 일각이 삼추라고 하겠다. - 사진은 최승희양. (*)